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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이름의 죄 (w. 키나 님/연성교환)

시로이 키쿠는 멍하니 백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의 깜빡임을 따라 조명이 점멸했다 켜지니 흐린 시야에도 말갛게 눈이 부셨다. 아니, 이게 정말 조명 때문이었던가? “키쿠.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떨쳐지지 않는 목소리는 여즉 선명하여, 키쿠는 본능적으로 제 왼손 약지를 긁어내리려다… 그제야 어떠한 공백을 자각했다.

 

‘그러고 보니, 잘라 냈었지…….’

 

인지와 망상, 이성과 광기의 경계가 뒤섞이는 기분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뭉툭하게 잘려나간 약지의 말단을 몇 번 매만지다 습관적으로 긁어냈다. 붉은 핏물이 손톱 끝에 묻어나나 얄팍한 행위에 마음 진정될 리는 없고 현실은 무엇도 변치 않았다. 절단된 부위에서 송골송골 솟아나는 붉음의 형태란 뻔한 이야기 속의 운명의 실이라도 모방하는 것만 같아서, 시로이 키쿠는 결국 텅 빈 웃음을 흘렸다. 이쥬인 아키라의 유품을 불태워 지워버리고, 결혼반지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남은 흔적을 견디지 못하여 맹약의 증표가 자리해 있던 손가락까지 끊어냈다. 그런데 왜,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은 끝까지 절 놓아주지 않는군요.” “그런 말 하지 마요, 키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는 이쥬인 아키라의 흔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천장에서 살랑이는 치맛자락은 목을 매단 시체를 모방하는 것만 같았다. 붉고 녹빛인 시선이 시로이 키쿠의 모습만을 비추었다. 저 시선을 끔찍하다 여긴 건 언제부터였더라. 의미 없는 회상은 무엇도 해결해 주지 않으며, 키쿠가 떠올릴 수 있던 건 끔찍한 형태로 절명하여 관에 온전한 시신조차 뉠 수 없던 이쥬인 아키라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절망과 의문에서 시작된 감정의 흐름이 어떠한 해방감에 가닿았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이러한 형태로나마 아키라에게서 벗어났단 사실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아니, 그가 처음으로 아키라의 환영을 보게 되었을 때만 해도. 이러한 형태로나마 이쥬인 아키라와 함께할 수 있단 사실에… 조금은…… 기뻐했던 것도 같았는데. 이리 치달은 현실의 형태란 일종의 원죄 모방하는 것만 같아서, 키쿠는 딱지가 내려앉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네, 저도 키쿠를 사랑해요.”

“당신과 그런 도박 따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키쿠가 있어서 죽을 때에도 웃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기뻐해 줄 거예요?”

 

이쥬인 아키라의 망령이 키쿠를 찾은 것은 고요했던 장례가 끝맺어진 직후의 일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키쿠의 삶은 순식간에 나락에 처박혔다. 거리를 거닐어도 패를 쥐어도 눈을 감아도 잠에 들어도 아키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트럼프 카드를 덜렁이는 내장 조각이 가리고 잘린 목이 발치에 굴러떨어지며 눈이 파인 시체와 입을 맞추었다. 깊은 잠을 무색의 온기가 방해하며 타인의 목소리에 소녀의 음성이 섞여 들었고 구워진 빵의 표면을 피투성이의 붕대 조각이 덮었다. 사랑스러운 것 바라보듯 파리한 손길이 그의 낯을 더듬으니 망자의 흔적에 속절없이 생이 흔들리고 있음을 자각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리하여 어느 날의 키쿠는 도박판을 앞두고서도 카드에 시선 두지 못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고…… 그 순간 시로이 키쿠의 삶은 온전한 무가치로 전락하였다.

교류의 단절이나 반복되는 악몽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다만, 패를 쥐었음에도 떨리는 손이나 이쥬인 아키라를 제하고는 모든 게 흐리게 비치는 시야 따위의 것은 키쿠의 생을 속절없이 망가트렸다. 시로이 키쿠에게 도박이란 곧 제 삶의 모든 것. 갬블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이 곧 키쿠의 가치였으므로, 그것을 빼앗겼음을 자각했을 때… 키쿠는 제 삶 끊어낼 적의 아키라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이쥬인 아키라를 제 삶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그것만이 키쿠가 제 삶 돌려받을 수 있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저 존재하기에 살아갈 뿐인, 모방과 반복밖엔 하지 못하는 고철덩이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패를 쥐기 전엔 몰랐을지언정 쾌락을 알게 되어버린 순간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었다. 환영을 마주하고 싶지 않단 미욱한 바람이 환영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으로 뒤바뀐 것도 이맘때쯤의 일이었는데, 키쿠가 상대의 존재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붉은 치맛자락은 선명해지기만 하였으므로 시로이 키쿠의 두 번째 비극은 이로부터 촉발됐다 보아도 옳을 것이다. 그야, 키쿠는 제 뇌를 들어내는 것 외의 모든 시도를 실패했으니까.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서야 겨우 숨을 뱉었다.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칩을 쥐어 본 것이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생이 어떠한 쓸모 지닐 리 없었다……. 생의 초입부터 새겨진 대전제 뒤바뀔 일은 없고 갬블이 없는 그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설령 이쥬인 아키라가 영원히 그의 곁에서 머문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망자에게 영원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건가…….’ “결국 키쿠도 영원히 저랑 함께하고 싶었던 거네요, 그렇죠?” 공허가 공허를 채울 순 없단 건 당연한 명제였으므로.

범람하는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어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불현듯, 키쿠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끝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무수히 많은 도모 사이 여태 시도하지 않았으며 시도 불발되지 않는 한 실패할 리 없는 마지막 행위가 하나, 남아 있지 않았던가. 생이 지옥으로, 사랑이 증오로 변모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로이 키쿠는, 정말… 이쥬인 아키라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끝을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이 죽음보다 끔찍한 자에겐 죽음은 안식이자 도피처였으므로, 하나의 충동. 질려버린 삶. 그만이면 충분했다. 꿈결 같은 욕망이 시로이 키쿠를 유혹했고, 키쿠는 더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조금은 다급한 손길이 먼지 쌓인 서랍장을 열었다. 그곳에는 주인 잃어 관리되지 않은 총이 널브러진 채였다. “키쿠, 죽고 싶어요?”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망설임 하나 품지 않은 채, 키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는 키쿠가 살았으면 하는데…….” 어차피 멎게 될 숨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총탄을 장전하고 그것을 제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아키라가 그를 바로 바라보았다. 외면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속절없이 시선이 마주했다. “그래도, 제가 키쿠의 죽음까지 소유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은 마음에 들어요.” 이쥬인 아키라는… 웃고 있었다. 말간 낯 하곤.

키쿠는 그제야, 그가 쥔 총이 아직 처분하지 못한 아키라의 흔적 중 하나임을 자각했다.

 

“당신의 삶은 내 것인데, 죽음까지도 내가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총을 쥔 손의 말단부터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참지 못하고, 키쿠는 총기를 거세게 바닥으로 내던졌다. 텅 빈 왼손 약지의 감각이 거슬렸다. 지독한 환상통이었다. 모든 걸 내버리고 싶다 바랐던 주제에, 키쿠는 자신의 마지막이 아키라의 그림자에 갇힌 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자살의 수단이 무엇이든 그가 아키라 탓에 죽음을 택했단 사실이 변할 리는 없었음에도…… 모순적인 행색.

아키라가 유감과 격려 담아 무어라 뱉는 목소리를 무시하곤, 키쿠는 바닥에 내던져진 총에서 비틀대며 등을 돌렸다. 정처 없는 걸음은 날붙이가 든 서랍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 걸로 죽으면 아플 텐데. 괜찮겠어요?”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식칼은 사람의 뼈대 가르기엔 적합한 수단이 아니었으나 아키라의 것 아닌 무기를 손에 쥐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키쿠는 저처럼 피학을 즐기지 않잖아요.” 적어도, 조금이라도 빨리 끝을 쥐고 싶던 그로서는 말이다.

날 끝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붉음이 맺혔다. 그 이상의 확인은 필요치 않았다. 조금 더 확실한 죽음을 위한 고민은 금세 끝이 났다. 침잠한 걸음을 따라 마룻바닥이 삐걱였다. “키쿠, 저를 봐요.” 칼의 손잡이를 붙잡은 손을 늘어뜨린 채, 키쿠는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래봤자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 알고 있잖아요…….” 욕조에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도 아키라의 목소리는 옅어지지 않았다. “인사도 안 해 줄 거예요? 제 장례식에선 마땅히 후회해 줬으면서.” 치맛자락이 키쿠의 주위를 돌며 그를 붙잡고 뒤흔드나 키쿠의 낯엔 동요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감상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뿐이었다.

습관적으로 약지를 긁어내리던 이가 욕조에 몸을 뉘이니 쏟아지는 물길이 그의 옷을 적셨다. 짙은 냉기에도 어슴푸레한 정신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방아쇠에 손가락 걸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미련이나 망설임 따위는 부재한 채였다. 참으로 우습게도, 마지막 순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얄팍한 의문 하나였다.

 

“이게… 아키라 당신이 바랐던 결말입니까?”

 

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답을 내어주든 변할 것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키쿠도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두 손으로 칼 손잡이 붙잡은 이는 곧 날붙이를 제 심장께 향해 겨누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강한 힘으로 팔을 당기면…… 절단보단 관통에 가까운 꼴로 금속 칼날이 박혔다. 엄습하는 고통에 키쿠가 막힌 숨을 터트렸다. 갈비뼈와 심장 꿰뚫기엔 한참이나 얕은 깊이, 그러나 물길에 잠긴 인간의 삶 앗아가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마른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나 금속 칼날이 추락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세찬 물소리가 좁은 욕실을 가득 매웠다.

이쥬인 아키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던가? 기능 잃어가는 시야엔 드디어 아키라의 모습이 흐리게 비쳤고, 키쿠는 그 사실이 퍽 기꺼웠다. 아키라는 썩어가는 살점 늘어트리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망자와의 입맞춤에선 혈액의 맛이 났다. 아키라의 붕대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찢긴 신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욕조를 물들이니, 키쿠는 욕조를 가득 채운 붉음이 제 것인지 아키라의 것인지를 좀처럼 구분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것이 중요한가? 그럴 리가. 이미 죽어버린 이에게 생의 마지막 형태까지 예속되었단 사실은 퍽 끔찍한 것도 같았지만…… 무의미한 후회였다.

옅은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시로이 키쿠는 피에 젖어든 욕조에서 눈을 감았다. 이쥬인 아키라의 사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꿈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