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감정)
2023년 8월 11일 오후 4시 30분의 대화이다.
좋아합니다.
- 착각이네요.
당신과 연인이 되면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각일까요.
- 예전부터 말씀드려야겠다고 여겼어요. 당신이 호의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
그게 관련이 있나요.
- 있어요. 내가 가엾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죠.
신경 쓰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행동해서요.
- 예전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으면서.
예전 일은……. 아니. 싫다는 말 돌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절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을 테니까…
- 당신은 내가 누군가를 정상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죠. 당신에게 보여주었던 성격을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 억누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때 왜 그랬는지도 알잖아.
둘 다 상황이 안 좋았죠. 긴장되는 상황에 놓여서는 조금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의미 없는 악의를 표출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화풀이나 돌파구 같은 것으로……. 내가 기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복수심리가 있었던 거죠.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니까 비슷한 처지를 바라고…….
- 그쯤 되면 많이 이해했다고.
네. 특별히 알려주지도 않으셨으니 이쯤 되면요.
- 사실은 나도 좋아해요. 그래서 그랬어요.
……
- 그렇다면 왜 거절하냐는 표정이네요. 내가 좋아하는 걸 아니까 고백하면 살지 않을까 싶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 왜 좋아하는데요?
모르겠습니다.
-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글쎄……당신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 나를 고쳤다고 믿나요?
어느 정도는.
- 평범하게?
평범하게.
- 나는 이제 평범한 걸 바라지 않아요. 정확히는 필요가 없어요. 떨어졌던 만큼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당신의 애정 따위 필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도 듣게 된 거겠죠? 이런 사고가 망가져 있다는 건 알아요. 이런 점도 고칠 수 있나요? 줄곧 가지길 바랐던 물건을 손에 넣으면 망가트리고 싶은 마음 모르나요?
그럼 왜 이제까지 버텼나요.
- 미련이 남아서. 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죠, 내게 집착하잖아요.
……그만둘까요. 역시.
- 쉽게 포기할 줄도 알고 있었어요. 내가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걸 아니까. 당신이 바라는 걸 얻기 위해서 내 자존심 같은 건 꺾어도 괜찮다고 판단하신 거죠.
내가 당신에게 특별히, 물질이나 심리적으로 바라는 게 있어서 호의를 베푼 게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었어요.
- 아니. 전부 너를 위한 일이었지.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예전 일을 용서하지 못하잖아. 패배를 극복하고 싶어서 나를 가엾은 처지로 치환하고 도와주는 사람을 자처한 거잖아.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나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이 아니라서 틀에 맞게 굳어지지를 않네요.
……
- 덮어놓고 싶었나요? 잊고 싶었나? 잊는 척 연기해주길 바란 건 아니고?
조금 진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 말대로 연기가 섞여 있었더라도, 서로에게 익숙해진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정리하더라도 차분하게 논의했으면 해요.
- 정리를 전제로 두는 발언이네요.
아마도.
- 죽여볼래?
…모르겠습니다.
-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모르겠다고 답하셨죠. 방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한 상대에게. ……그것밖엔 안 되나요? 평생 내게 진 기억에 얽매여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복수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완전한 연애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남은 건 대체 뭐예요? 당신이 행복하고 충만할 때에 분명 마음속에 진 그림자가 있겠죠. 내가 빛을 가리고 서 있기 때문에 생긴 그림자라고 여기면서. 그걸 덮어두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고 기만하고 미성숙의 탓을 돌리지 마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서 하는 말들은 아니죠.
- 그럼 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