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이 키쿠는 이쥬인 아키라를 내려다본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낯은 천사 같다는 수식언이 어울릴 행색이나, 키쿠는 아키라의 본질이 그것과는 무척 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악이란 선의 부재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 무엇도 쥐지 못한 이쥬인 아키라는 순수하기에 악의적이었다. 텅 비어있기에 비틀렸고, 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타인의 생을 짓밟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무언가를 망가트리고 부서트리는 것에 자그마한 죄책감조차 갖지 못하는 아키라 특유의 성정은 어쩌면 재해라는 말로밖엔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시로이 키쿠는 그 재해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사람이었으며, 속수무책으로 휘말리고 휩쓸리는 그 일련의 과정 사이 그의 의사란 무엇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시로이 키쿠는 물음의 답을 알지 못하나,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고할 수 있었다. 이쥬인 아키라의 사랑은 잘못되었다. 그런 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러선 안 된다. 아키라가 키쿠에게 가진 감정이란 비틀리고 뒤틀려 폭력이란 수단 통해 발현되는 소유욕,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
수 번이나 벗어나고 싶다고 바랐다. 수 번이나, 그 손길이며 시선이랄 것이 끔찍하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이에 수긍하고 따를 수밖엔 없던 건 과거의 시로이 키쿠가 내건 것이 자신의 영혼이었으며 시로이 키쿠라는 존재였기 따름이다. 그의 생이랄 것이 이미 잃어버린 판돈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박사로서의 긍지이자 시로이 키쿠를 구성하는 모든 것. 도박이라는 이름 하 타인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것에 쾌락을 느꼈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키쿠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 겨누어졌을 때조차 그 결과에 체념하듯 수긍할 수밖엔 없었다. 그것이 무채색인 그의 세계를 유채색으로 물들일 수 있을 유일한 가치였으므로, 그는 이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면, 시로이 키쿠는 문득… 충동적으로 욕망을 따라 사고하고는 만다. 그의 백색 시선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따라 올라가 이쥬인 아키라의 목덜미에서 멎는다. 부러질 듯 얇은 목, 무방비하게 내쉬는 숨결. 저것을 틀어막고 완전히 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어진 것은 물음이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이쥬인 아키라라 한들 그 또한 인간이다. 숨을 내쉬지 못하게 되고, 동맥이 끊기고, 심장이랄 것이 멈춰 버린다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나약한 존재. 지금 당장 저 목에 손을 얹고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 시로이 키쿠는 이쥬인 아키라에게서 벗어나 자유랄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한 감정이며 사랑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당연한 사실이자 어쩌면 꿈결 같은 바람이다. 그 이쥬인 아키라라면 목이 졸리고 생이 멎어가는 순간에서조차 키쿠의 손길을 거부할 리 없을 거라 여기는 자의…… 인간성의 말로. 관계에 대한 신뢰가 아닌, 아키라의 생에 대한 무의미와 자기학대성을 향한 믿음.
주체가 누구라 한들, 키쿠는 살인이랄 것에 거부감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의 생을 증명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의 몰락이었고, 애초 누군가의 죽음에 눈물 흘리기엔 시로이 키쿠의 생조차 근본부터 뒤틀려 있던 탓이다. 따라 그러한 어긋남 위 기이하리만치 방향성만은 확실하던 열망이 더해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정신을 차리면. 시로이 키쿠는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잠든 이쥬인 아키라의 목 위 느릿하게 손을 얹은 채다. 네 사랑이 끔찍해. 형상화되지 않은 언어가 목 아래 맴돌다 느릿하게 지워진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바람은 분명하고, 바람을 이루기 위한 수단조차 명백하다. 나는 네가……. 따라 시로이 키쿠는 이쥬인 아키라의 목
위 얹은 손에 느릿하게 힘을 준다. 네가, 끔찍하게도,
언어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쥔 손 위 그 이상 힘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히듯 시로이 키쿠의 손이 파들거리며 떨린다. 죽음의 무게란 가볍고 생이란 덧없을 뿐임을 알고 있음에도, 시로이 키쿠가 이쥬인 아키라에게서 벗어날 방법이란 이뿐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곳으로 한 발짝 걸음 딛는 것을 시로이 키쿠의 생이 거부한다. 어째서? 물음이 내어지나 답만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뻔했고, 또 어쩌면 그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던 까닭이다.
숨이 거칠어진다. 목 위 가닿아 느껴지는 체온이 유달리 생경하다. 손끝 더해지는 힘은 살갗의 감각 느낄 적이면 무의한 것으로 변모한다. 백색 시선이 파리하게 질린다. 키쿠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자각은 필연이며 숨막히되 누군갈 살해할 수는 없을 압력이 아키라의 기도 위 내달린다.
증오가 부족하다 여긴 적은 없었다. 살인을 꺼리는 마음 따위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이쥬인 아키라이기에 가질 수밖엔 없던 마음이며 감정이랄 것이, 눌린 기도보다도 더욱 깊이 키쿠를 압박한다. 정말로 자신의 몸과 마음까지도 아키라에게 예속된 것은 아닌가, 들어오는 생각은 비웃음을 닮았다. 그리하여,
“키쿠.”
느릿하게 눈꺼풀 들어 올려지고 그 속 붉음에 제 모습 담길 적이면. 녹빛 시선이 유하게 휘어지면서도 그의 모습 거울처럼 비출 때면.
“왜 거기서 멈춰요, 더…… 깊게 누르지 않고.”
시로이 키쿠는 속절없이 쥔 손 놓아버리고는 만다. 아키라에게서 도망치듯 한 걸음 떼는 간극은 공포를 닮아 있다. 하지만 그조차 허락하지 않겠단 것마냥, 목 위 자리하던 압력이 지워지면 아키라의 손은 키쿠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녀는 그대로 상대의 손 끌어 제 목 위에 다시 놓는다. 저항 없는 이끌림, 그 너머 파리하게 질린 낯. 그에 이쥬인 아키라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간다. 집착이라 불려 마땅할 광증이다…….
“키쿠의 손에 죽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여 줄 수 있는데. 왜 망설여요. 도와줄까요?”
키쿠와 아키라의 시선이 곧게 마주한다. 아키라가 강한 힘으로 키쿠의 손목 끌어당기면, 손아귀엔 힘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아까보다 강한 압력이 아키라의 목을 조른다. 내뱉어지지 않는 숨이며 점차 혈색 지워지는 낯, 그러나 웃고 있는 것은 아키라며 공포 앞 자리한 것은 키쿠였다. 뒤집히지 않고 그럴 수도 없을 관계의 방향성만은 뚜렷하여, 키쿠의 손목 붙잡은 압력과 같이 관계의 높이만은 분명히 규정된다.
산소 부족한 몸이 생리적인 신호를 내뱉는다. 이쥬인 아키라의 생을
증명할 수 있을 유이한 대상이 이곳에 모두 존재한다. 아키라의 미소랄 것은 옅어질 기미 보이지 않고, 시로이 키쿠 붙잡은 압박이란 그녀의 생 꺼져가는 순간에조차 분명하다. 이대로, 아키라의 생이 멎어버린다 할지언정 달라질 것 없을 거란 분명한 확신이며 마음. 그 이상으로 아키라의 끝을 바라지 않는, 원인 불명의 일렁임.
쌓여온 시간은 길었되 그것 터져나가는 건 한순간의 일이다. 한 번 더, 막힌 숨소리가 들린다. 도화선이랄 것은 그만으로도 충분했다. 꺼질 듯한 숨 인지한 순간 키쿠는 손목 붙잡은 아키라의 손을 강한 힘으로 뿌리친다. 손가락 끝이 잘게 떨린다. 갑작스레 들이켜진 숨에 아키라가 호흡 콜록대며 내뱉는다. 누운 그대로 아키라의 시선만이 데룩 굴러 키쿠에게 가닿는다. 키쿠는 그 시선 외면하지 못한다.
“망설일 필요 없다니까.”
“……아키라.”
악몽을 닮은 낮은 웃음소리 키쿠의 귓가에서 맴돈다. 감정 잦아들 기미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는 느리게 몸 일으킨다. 삐걱이며 고개 들어 키쿠를 바로 바라본다. 그에게로 가까이 발 딛는다. 거리를 좁힌다. 그것은 끝을 선고하는 사신의 형상 닮아 있어,
“역시, 키쿠도 절 사랑하시는 거죠?”
황홀경에 가닿은 목소리는 키쿠의 마음속 여과 없이 파고든다. 그 무엇보다 폭력적인 형상 띠고서.
흰 피부 위 붉게 남은 손자국이 유독 선명하다. 키쿠는 문득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이 택하여 아로새긴 흔적임에도 푸르죽죽한 색은 저주처럼 그를 옭아맨다. 그 흔적 남긴 것이 아키라의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아키라의 생 멎게 두어버린 순간, 그때야말로 시로이 키쿠의 생은 그녀에게 온전히 종속되어 버렸을 거란 사실을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냐는 물음에 그는 입 열지 못한다. 다만 키쿠는 생각한다. 시로이 키쿠라는 생 위 남은 이쥬인 아키라의 행적에 대하여. 지금의 시로이 키쿠에게, 이쥬인 아키라라는 한 인간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던가. 키쿠는 아키라를 증오한다. 그녀의 사랑이 끔찍하다 여기고, 벗어나고 싶다 갈망한다. 그것은 생의 대명제다. 하지만 증오란 때때로 사랑보다도 강한 흔적을 아로새기고는 해서, 시작의 그 순간 이쥬인 아키라가 갈망했던 것처럼, 시로이 키쿠는 아키라의 생이 다하기 전까진 그녀의 곁 떠나갈 생각조차 품지 못할 터였다. 이쥬인 아키라가 죽은 후에도, 어쩌면 그 사실만은 변치 않을 것이었고.
시로이 키쿠의 생에 있어, 도박을 제하고 그가 이리 강한 감정 느낄 수 있던 대상 있었던가.
문득 그런 문장이 떠오른다. 이쥬인 아키라가 사랑이라 규정지은 감정의 결과 꼭 닮아 있으나…… 시로이 키쿠만은 사랑이라 칭할 수 없던 애정과 증오의 갈래. 그럼에도 동시에 사랑 아니라 규정지어질 수만은 없던 것. 일렁임을 자각할 즈음이면, 다음 문장은 반사적으로 입 바깥으로 비져나온다. 이룰 수 없을 것을 알기에 바랄 수 있는 가치란 분명 존재한다. 지금처럼.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 순간 키쿠가 제 곁에 함께해주신다면, 얼마든지요.”
“……너라는 존재가 끔찍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절 사랑하시잖아요.”
“그 누구보다도, 나는 네가 증오스러워. 이쥬인 아키라.”
문장을 건너, 남은 찰나의 간극조차 좁히듯 아키라가 키쿠에게로 한 걸음 더 발 딛는다. 이번만은 키쿠도 물러서지 않는다. 의미 없음을 알고 있어서다. 곧 아키라의 팔은 그의 몸 위로 겹쳐 든다. 매끄럽게 휘어지는 시선이란 아키라가 키쿠의 생 손아귀에 쥐던 그 순간의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기엔 텅 비었으며 생이랄 것에 서로의 존재밖엔 쥐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과거의 그 날과 달라질 수 없던 것일지도 모르고.
목덜미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키쿠의 몸 끌어당기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아키라에게로 가까워진다. 고개 기울어지고, 이내 겹쳐 드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건조하고 눅눅한 입맞춤은 절망의 색 품고 있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공백 사이 키쿠는 느리게 눈 내리감는다. 모순되게도 상대의 존재를 탐한다. 속절없이 떨리던 손끝은 잦아듦에도 아키라의 목 위 아로새겨진 멍 자국만은 그 색을 더해간다. 눈 감아 흑색으로 물든 세계 너머에서도, 청자색 흔적만은 키쿠를 붙잡으며…….
짧고도 길었던 입맞춤은 건조하게 끝이 난다. 마찬가지로 먼저 숨 거둔 것은 아키라다. 떼어진 고개 너머로 아키라가 키쿠와 시선 맞춘다. 거칠어진 숨소리.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 여겨, 이쥬인 아키라는 입을 열어 고한다. 저주처럼.
“사랑해요, 키쿠.”
부정할 수단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안다. 시로이 키쿠의 생 쥔 이의 존재만은 분명하다. 따라, 키쿠는 그 형상 바라볼 뿐이다. 무력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