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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누구보다 극적인

여기요.

아키라는 키쿠가 어떻게 손을 써도 열리지 않던 유리병을 참 쉽게 비틀어 따낸다. 얇고 긴, 창백한 손가락들이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바깥의 사이렌에 묻혀 흩어진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나갔다 올게요.

그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입고, 작년 생일 키쿠가 선물해주었던 하늘색 인조가죽 핸드백을 들고 현관까지 걷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발걸음엔 즐거움이 묻어난다. 무엇을 하러 가는지는 알리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단 느낌이 든다. 말하지 않을 뿐.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문이 열리고 "다녀올게요"라는 인사가 한 번, 다녀오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도어락이 잠기는 멜로디가 흐른다. 베란다부터, 식탁 앞에 선 사람의 발끝까지 늦은 오후 햇빛이 가로지르고 나머지 모든 사물엔 그림자가 내려앉은 광경을 키쿠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주말이었으나 일과가 없었다. 그런 날도 있어야지, 라고 말한 상대는 본인의 용건을 위해 외출해버렸고 텅 빈 넓은 집에 혼자 남을 때마다, 벌레 수천 마리가 몸을 기어오르듯 어떠한 생각이 사고를 지배한다.

 
시로이 키쿠는 이 모든 것이 연극 같다고 생각한다. 이 극 속에서 자신은 이쥬인 아키라를 사랑하고 그와 같은 집에 살고 함께 식사하고 잠들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열리지 않는 게 있다면 그에게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극단 구성도 두 명뿐이며 무대 장치도 조명도 우리가 선택하고 연출해야만 하는.

명확한 보상을 받고 있으나 입에 올리는 순간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무대 위에서 월급에 관해 떠들어대는 배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쪼록 먼저 잘못된 대사, 행동, 음악, 빛을 건드려버린 사람은 야유를 받으며 단상 위에 서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손뼉을 치며 웃게 될 테다. 스크린 너머를 관망하듯 박수 소리가 울린다. 짝, 짝, 짝.

앙코르!


그래서 인터벌 동안에는 왜 이러한 생활에 어울려주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쩌면……이 모든 것이 연극임과 동시에 도박과 지나치게 닮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단 결론에 도달한다. 손뼉을 치게 될 이는 누구인가? 바로 관객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은 사람이다. 돌아가야 할 곳을 아는 사람은 이런 무대에 영영 머무르지 않는다. 키쿠의 머릿속에서, 붉은 벨벳 천 의자에 앉아, 느린 템포로 재청을 요구하는 관객. 그는 정확히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나……?

식빵 두 개 사이에 딸기잼을 바르고 머그잔에 우유를 따른다. 먹고 마시면 가까운 희극의 맛이 난다. 누군가는 멀리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지고 싶지 않아지는데, 자신은 중요한 갬블에서 한 번도 아키라를 이겨 본 적이 없단 사실 역시 떠오르고 만다.


모순적 호의로 채워졌던 접시가 빈다.

창 너머로 노을이 지는 모습이, 그의 시야를 장악한다.매일 보는 풍경임에도 관성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어두면 좋겠다고 여긴다. 그 사진을 누구에게 보여주는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현관문 앞에는 정리를 잊은 실내용 슬리퍼가 뒹굴고 있다.


막이 내리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