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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w. 키나 님)

무엇도 좋아하지 않고, 무엇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취미, 특기, 습관, 호불호…… 모든 것이 지워져 버린 백지이자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 그것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이쥬인 아키라의 세계는 언제나 잿빛이었다. 그녀가 무엇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고, 세계는 돌아가며, 그 가운데에는 상처투성이의 소녀 한 사람만이 덩그러니 자리해 있다. 갈망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소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알지 못해 그나마 쥔 것조차 전부 부서트려 버렸다.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못하니 자신의 생조차 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당연한 수순으로 스스로에게조차 애착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생이고, 삶이었다. 비틀려 있다는 문장으로밖에는 포장할 수 없을. 어쩌면 그런 문장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따라, 아키라는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삶의 진정한 의미, 자아의 실현… 그런 것 따윌 바랐단 이야기가 아니다. 아키라는, 이곳에서 자신이 숨을 쉬며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죽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생이라는 것의 가치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애착의 부재는 미련의 부재로 이어지고, 그런 의미에서 이쥬인 아키라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섞여들지 못하고 무언가를 바라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삶 사이, 그녀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숨을 쉬고 땅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 살아있다 불리우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는 것.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것. 갈망하는 법을 알게 되어간다는 것. 이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엔 없는 욕망으로, 당연히도 그 이쥬인 아키라에게조차 통용되는 가치다. 감정에 둔감하고 윤리 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사회적인 의식조차 부재되어 있다고 한들……

그 무엇도 갈망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쥐고 싶어지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니.

 

그래, 단적으로 말해서…… 이쥬인 아키라는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상관이 없다 언제나 생각했으나, 그런 삶이니 생의 의미를 찾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순간을 언제나 바라왔다. 존재의 의미를 갖고 싶었다. 거짓뿐인 세계에서나마 숨을 쉴 당위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색채를 가진 것은 손을 댈 때마다 바스러져 버리고, 잿빛 세계 속의 그 무엇에조차 아키라는 온전히 마음을 둘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을 맞이하여.

살갗이 까진다. 상처가 난다. 붕대가 감기고, 그 위로 붉음이 덧씌워지며, 피부가 헤집어진다. 뼈가 보일 듯 드러난 상처는 고통에 둔감한 그녀로서도 아프다 자각할 수밖엔 없는 종류의 것이고, 그 사이 아키라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쾌락을 함께 느낀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 순간만큼은 아키라조차도 자신이 이곳에 살아있단 사실을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현실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음에도, 흐르는 핏물 사이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다. 고통으로 생을 증명할 수 있다 여기는가? 물음에 답은 낼 수 없으나,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자신이 지금껏 쥐려 했던, 혹은 쥐고 싶었던 수많은 것들과는 달리. ‘쇼우’ 는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 리도 없고.

짤막한 생 사이, 이쥬인 아키라가 처음으로 깨달은 가치는 그것이다.

사실을 자각하면,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더욱이나 간단하다.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난다. 자해는 버릇과도 같고, 태생적으로 고통에 둔감하다는 사실조차 종종 아쉽다 여기고는 만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다음의 깨달음은 찰나의 일이며. 열아홉의 생일, 이쥬인 아키라는 두 번째로 갈망한다. 이제 누군가 나를…… 몰아붙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것은, 애착을 가진 것이 망가져 완전히 재기불능이 되지 않고서는 멈추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닮아 있다.

 

 

비틀린 갈망을 만족시켜줄 존재를 찾지 못했으므로, 열아홉의 생일 이후로도 아키라의 삶이란 것이 격변하는 일은 없었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할지언정 시간은 끝없이 흘러가며, 그사이에 선 이쥬인 아키라만이 정체되어 있다는 현실도 바뀌지 않는다.

다만 드디어 입학하게 된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클래스메이트라는 이름 하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하며. 언제나처럼 입발린 듯 내뱉는 거짓말, 무감한 문장, 빼앗김과 빼앗음의 연속 사이에서조차…… 자그마한 취미랄 것이 몇몇 생겼다. 그중 하나가 작고 큰 판돈을 걸며 벌이던 시로이 키쿠와의 도박이다.

잦게 패배하고, 잦게 승리했다. 동전 몇 푼에서 신체의 일부, 인간 자체의 소유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걸었고 땄으며, 또 잃었다. 도박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무엇 하나 쥔 것이 없어 잃음에 애환 따위를 가질 수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무엇에든 애착을 둘 수 없었으므로 얻는 것에 대한 기쁨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 과정 사이, 시로이 키쿠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카드를 손에 쥐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라는 인간이 얼마나 변모하는지를, 도박이 없는 그가 얼마나 텅 비어있는지를 명백히 인지한다. 생각이 가닿는 지점은 정해져 있다. 당신도, 도박이 없으면 텅 비어있는 거네요. 나처럼. 낮게 웃는다.

도박 없는 시로이 키쿠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문하면, 아키라는 저것이 자신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결론을 쥔다. 동시에, 새로운 장난감을 마주하듯 그를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다고 바란다. 애착을 닮았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축축하고 음습한 감정이 마음속을 내달린다.

 

이쥬인 아키라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파멸한다. 아키라가 그리 만들기 때문이다. 시로이 키쿠라 한들,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가 대상이 된다 해도 그 사실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이쥬인 아키라가 완전히 망가져 스러지는 것보다 그가 먼저 빛이 바랠 것은 뻔했고…… 결국 언제나처럼 텅 빈 아키라만이 그곳에 남게 될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당신이 괴로워서 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것을 쥐고 싶다는 갈망을 지울 수가 없어서.

전부 빛이 바랬다 해도, 아키라의 삶에서도 좋아했다 표현해야만 했을 대상은 여태껏 수 개나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아키라는 그것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다고 바랐다. 완전히 으스러트려 본래의 형태조차 잃게 되는 방식이라 한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랐었다. 무미건조한 삶이기에 감정의 격류는 그 무엇보다 분명했고, 유의미를 겪어본 적 없는 삶이라 자각만은 느리다. 그렇기에 이 순간에서야, 이쥬인 아키라는 이 감정에 걸맞은 이름을 정의하는 것에 성공한다.

망가트리고 싶다 바라고,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갈망하며, 그것이 부서지는 순간 다시금 공허에 잠식되어 버린다. 쥔 것 없고 무엇 하나 쥘 수 없는 삶 사이, 피학성을 제외하고 아키라의 목적이 될 수 있을 유일한 것. 흘러가는 순간뿐이라 해도, 그녀의 삶을 증명해줄 수 있는 애착의 대상. 바라 마지않는 것.

그러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정의하고서, 아키라는 작게 실소한다. 살인 게임이 벌어지는 학교,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실. 예정된 파멸의 장. 여지껏 다른 것들이 어떤 말로를 맞이했든, 아키라가 키쿠를 망가트리는 것보다도 이 섬에서 우리 모두의 생이 다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아키라는 확신한다. 따라 이 순간, “당신의 영혼은 제 것이죠. 그러니 키쿠의 마지막도 제게 주세요.” 이쥬인 아키라는 그 무엇보다 찬란한 낯으로 웃는다.

 

“사랑해요, 키쿠.”

 

선의도 호의도 아닐 이 진득하고 축축한 감정을 키쿠가 얼마나 꺼림칙하게 여기든,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든, 그가 아키라를 얼마나 증오하고, 끔찍하다 생각하며, 벗어나고 싶다고 여기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감정이 그를 향한 동질감과 피학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단지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혹은 제 소유물을 향한 집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실 따윈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지 오래고, 이 순간 유의미한 것이라곤 키쿠가 아키라의 삶에 쥐여준 하나의 가능성 혹은 가치. 그뿐이었다.

시로이 키쿠와 함께 맞이하는 키보가미네에서의 마지막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제게 안겨줄까. 네 죽음은 얼마나 괴로울 것이고, 삶의 이유가 남아있음에도 맞이해야 하는 끝이란 얼마나… 아플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키라는 황홀한 기분이 되어버리고는 만다. 열아홉의 생일, 자신이 바랐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그녀의 마지막을 장식해줄 피날레에 대한 기대. 그것을 끌어안은 채,

아키라는 약실에 총탄을 장전한다. 생의 의미를 위한 갈망은 어느덧 죽음의 의미를 위한 희곡으로 변모해버린 후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